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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대부도의 역사

2. 삼국・고려시대의 대부도

이 현 우/안산향토사연구소장 | 기사입력 2024/03/04 [22:16]

<기획특집 >대부도의 역사

2. 삼국・고려시대의 대부도

이 현 우/안산향토사연구소장 | 입력 : 2024/03/04 [22:16]

  이 현 우/ 안산향토사연구소장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한강유역과 인천이나 남양만 방면에서 덕적도를 거쳐 황해를 건너 증국으로 통하는 해상교통보를 장악하려는 삼국간의 치열한 지배권 다툼에 따라 그 소속이 여러차례 변환되었다.

 

대부도 일대를 처음 지배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서울 부근에서부터 점차 성장하여 3세기 중반경부터는 경기 충청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나갔는데 대부도는 이 무렵에 백제의 세력권내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 말부터 5세기 까지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따른 공격과 백제의 대중국 해상교통로를 자주 차단함으로써 대부도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도 상당히 약화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475년(장수왕 63, 백제 개로왕 21)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여 서쪽으로는 남양만에서 동으로 충청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거쳐 동해안의 영일만에 걸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대부도의 옛 사진


그리고 이 때 고구려는 남양만 지역에 당성군(當城郡)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대부도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당성군에 소속되었다.

 

금강유역의 공주로 천도한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나가자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이에 대응하는 한편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고구려가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백제 성왕은 신라와 함께 551년에 북상하여 숙원인 한강유역을 탈환하였는데,이에 따라 대부도 지역도 다시 백제의 세력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2년 후인 553년에 신라 진흥왕은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남양지역에만 당항성(唐項城)을 쌓아 여기서부터 덕적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해상교통로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에 따라 대부도 지역은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신라의 대 중국 교통로를 차단하려는 백제와 고구려는 당항성에 대하여 여라 차례에 걸쳐 공격 하였지만 신라는 이곳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한편 남양만 지역을 처음 장악한 553년(진흥왕 14)부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까지 신라는 당성군이란 고구려시대의 지명을 계속 사용하여 오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대부도 지역은 계속하여 당은군에 소속되었다.

 

다만 당은군의 지명과 그 관할처가 여러 차례 변환되었다. 고려 초에 당은군을 고쳐 고구려시대의 지명인 당성군으로 하고 인천에 소속시켰다.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의 속군으로 삼았다가 뒤에 인주로 환원하였다.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고 1303년(충렬왕 34)에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하였는데 1310년(충선왕 2)에 전국의 목이 폐지됨에 따라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로 삼았다.

 

이 때 남양도호부에는 대부도 지역을 비롯하여 영흥 · 덕적 · 자월도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대부도와 선감도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대부도는 ‘대부 도(大거느릴部島), ‘대부도(大마을府島)’등으로, 선감도는 ‘선감미도(仙甘미륵彌島)’로 표기하였다.

 

 

13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는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몽고세력의 흥기였다.

 

13세기 초엽 테무진이라는 영웅이 나라와 흘흩진 부족을 통일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가 유명한 징기스칸이다.

 

이 때부터 몽고는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을 침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해지더니 마침내 고려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1225년(고종 12)에 고려에 왔던 몽고 사선 재구유가 돌아가다가 압록강 유역에서 피살되자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고려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몽고는 1231년(고종 13) 제1차 침입으로부터 1259년(고종 46)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전후 9차례나 침입하였다.

 

오랫동안에 결쳐 몽고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여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 무인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일반 민중들도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는데,대부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고의 제7차 침입(1225년 가을 ~ 1256년 9윌 )이 있던 고종 43년(1256) 4월에

 

‘대부면볉초가 밤에 인천접경의 소래산 아래에 나가 몽고병 100명을 격주(擊走)시켰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실례이다.

 

몽고의 맹렬한 공격에 대해 고려정부와 일반 민중들은 끈질긴 저항을 하였으나 1258년(고종 45)) 최의(崔竩)가 몽고와 강화하려는 세력에 의해 피살되고 끝까지 반몽정책을 고수하던 임유무(林惟茂) 마저도 반대파에 의해 제거되자 고려는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아직 반몽항쟁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1270년(원종 11) 출육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하여 배를 타고 남하하여 한때 영흥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다가 곧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하에 넣고 제주도로 옮겨 적에게 평정될 때까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삼별초가 진도로 내려가 항몽전을 계속하자 많은 지방의 호응이 있었는데 이점에 있어서 대부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⓵ 원종 12년(1271) 2월 신축(辛丑)에 칙량(窄梁, 손돌목)을 지키던 몽고병이 대부면에 들어가 거민(居民)을 침탈하니 백성이 심히 원망하더니 대부인이 숭겸(崇謙)이 봉기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몽고인 6명을 죽이고 반하거늘 수주부사 안열(安說)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정하니…

 

⓶ 원종 12년(1271)에 칙량방술(窄梁防戌)의 몽고병이 대부면에 들어가 주민을 침략하였으므로 도인(島人)들이 분노하여 몽고병을 죽이고 반란하거늘 수주부사 안영리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평정하매…

 

13세기는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대부도와 대부도 주민들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때였다.

 

그리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인 해도로 침입하여 강화도로 통하는 교통로를 차단하려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몽고에 항복과 같은 의미인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봉기한 삼별초 정부를 지지하고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는 2002년과 2006년 2차에 걸쳐 흥성리(남5리) 육골[六谷]의 석곽묘군을 발굴조사 하였는데,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다수의 석곽묘 10기, 토광묘 37기가 조사되었고 많은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상인들이 물품을 포장하고 봉인하는 인장, 도자기, 중국의 동전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대부도가 중국과의 해상무역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곳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2003년 대부도 서북쪽 해안에서 현지 주민이 발견하여 제보한 고려시대의 선체를 2006년 12월 선체수습 및 추가유물 잔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고려중기의 전통 한선 선체로 확인되었고 선체 외에 고려청자와 백자, 도기류들이 다수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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