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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 편집국장 컬럼>안산의 미래, 수도권의 보물섬 대부도에서 찾는다

김태창 기자 | 기사입력 2022/09/27 [13:32]

<김태창 편집국장 컬럼>안산의 미래, 수도권의 보물섬 대부도에서 찾는다

김태창 기자 | 입력 : 2022/09/27 [13:32]

 

  ▲ 현재 대부동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대부동행정복지센터 건물이다. 대부북동(상동)에 위치해 있다.

 

  ▲ 옛 대부면사무소 건물이다. 1934년 6월 건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당시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대부도에코뮤지엄센터가 들어서 있다. 


-대부동 개요

 

대부도는 현재 인구가 6,456세대, 9,373명이다. 내국인이 9,237명이고 외국인도 136명에 이른다. 인구 1만명이 안되는 지역에 주말이면 10만명에서 20만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대부도를 찾는다. 대부도가 관광지로 불리는 이유다. 면적은 43.9㎢로 시전체의 28.1%, 단원구 전체 44.6%를 차지하고 있다.

 

행정동인 대부동(20개통 52개반)에 법정동은 대부북동, 대부동동, 대부남동, 선감동, 풍도동 등 5개동이다. 65세이상 인구는 2,914으로 전체인구의 31.5%다.

 

대부도는 조선시대 남양군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3월 부천군, 1973년 7월 옹진군(대부면), 1994년 12월 26일 안산시로 편입(면에서 동으로 전환), 1997년 7월 16일 대부출장소로 통합, 2005년 4월 20일 대부동으로 전환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동은 주봉인 황금산을 주축으로 94.69㎢의 해안선 길이와 50.4㎢의 갯벌, 15개의 섬(유인도 6개, 무인도 9개)을 보유한 천혜의 해양자연환경을 지닌 도서지역이다.

 

시화지구개발 사업으로 1988년 5월 화성군 서신면과 연결된 이후 1994년 1월 21일 시흥시 정왕동과 방아머리 12.7㎞의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명실상부 섬마을의 멍에를 벗고 자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휴양지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 주민투표에 의해 옹진군 대부면에서 안산시 대부동으로 행정구역이 조정되었다.

 

당시 시화호 간척사업 직후 경기도 본토와 이어지면서 시흥시, 안산시, 화성군 중 새로 소속될 기초자치단체를 뽑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안산시가 가장 많은 득표수(50.4%)를 차지하여 1994년 12월에 안산시로 편입되어 행정동 대부동으로 개편되었고 대부동 관할 법정동으로 대부도 본도의 대부북동(구 북리), 대부남동(구 남리), 대부동동(구 동리), 선감도와 탄도 일대에 해당되는 선감동(구 선감리), 풍도 일대에 해당되는 풍도동(구 풍도리)의 5개 동으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른다.

 

돈도 돈이지만 애초에 시흥시청은 안양에 있던 게 소래로 옮겨와 시 승격된 지 고작 6년차였고, 화성군은 아예 시청도 아닌 군청이 오산에 박혀있던 시절이니 승격 9년차에 인구 40만을 돌파해 대도시로 나아가던 안산시청을 주민투표에서 이길 도리가 없었다.

 

사실 대부도는 옹진군 대부면이었다. 1994년에 내무부는 지방자치제를 대비해 인천직할시를 광역시로 개편하여 옹진군을 편입하기로 했는데, 대부도는 경기도와 육지로 이어져 있고 인천과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시흥시, 화성군, 안산시 중 한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주민투표를 통하여 1994년에 안산으로 편입된 것이다. 당시 주민투표 결과는 안산:시흥:화성=50:47:3으로 나타났고. 지금 보면 안산이 왜 여기 껴있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시화 방조제 건설 이전에는 사리포구에서 舊방아머리까지 배가 다녔기 때문에 주민들 입장에서는 이왕 갈거면 교통편도 있(었)고 공단도 있어 돈 많은 안산시를 택할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도 소개

 

대부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큰 것을 뜻하며 여러 섬을 다스리는 뜻과 도시 중의 중심도시라는 뜻으로 불리다가 남양 쪽에서 대부도를 바라보면 섬 같지 않고 큰 언덕처럼 보인다하여 ‘큰 언덕’이라는 뜻의 대부도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대부도의 가장 높은 곳은 북쪽에 있는 황금산(黃金山) (143m) 이고, 황금산 서쪽에는 뻐꾹산 (69m) 이 있으며, 주변에 높이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이 있다. 뻐꾹산 동쪽에는 북동저수지가 있다. 대부도에는 황금산에서 발원하는 방죽천, 뻐꾹천, 분지천, 영전천 등 4개의 하천이 있다.

 

또한 안산시 서해안에 위치한 농·어촌 복합의 해양관광지로서 시화지구개발 사업으로 육지와 방조로 연륙되면서 해안가 갯벌을 찾아 조개를 채취하며 휴가를 즐기는 가족단위 행락객들과 차량을 이용해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로, 수도권 내 최고의 1일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재배하고 있는 대부포도는 경기도는 물론, 전국에서 알아주는 농산물로 정착되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포도 수확기에는 온 고장이 달콤한 포도향기에 젖어 지나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늦추게 한다.

 

-대부도와 삼별초

 

기록에는 대부도 주민이 몽고에 항거하던 원종 12년 호응하는 세력이 각 지방에 ‘먼저 봉기한 말양에 호응하자’는 요지의 격문을 사방으로 돌린 지 7일 만인 1월 29일 개경에서 숭겸, 공덕등이 백성을 모아서 몽고관료를 살해하고 삼별초정부로 투신하려 하였다. 이 파급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이 때 대부도에서도 몽고인을 살해하고 반기를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13세기는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대부도와 대부도 주민들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때였다.그리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인 해도로 침입하여 강화도로 통하는 교통로를 자단하려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몽고에 항복파와 같이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봉기한 삼별초정부를 지지하고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대부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대부도 지역은 계속하여 남양도호부에 따르면 대부도에는 한때 사슴이 많아서 사슴을 잡아 진상했다는 사실과 함께 숙종 4년에 사슴이 멸종할 정도로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부터 문헌에 기록된 대부도와 선감도 외에 풍도,불도,탄도 등이 문헌에 나타나던 때였다.

 

대부도에 군둔전설치가 처음 논의된 것은 성종 18년(1487) 정원이었다. 이 때 경기도 관찰사 성건이 대부도 지도를 왕에게 올리면서 “대부도는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져 가히 200여 석을 거둘 수 있고 해택이 있어, 역시 200여 석을 거둘 수 있으므로 마땅히 목장과 경계를 지어 말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하고 화량에 명하여 선군 가운데 반을 떼어 경작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도의 국영농장

 

조선시대에는 대부도 관내의 대부도 · 선감도 · 불도 · 풍도 등지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도 목장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이 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세종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에 대부도 목장에는 말 418필과 염전 4호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선조대에는 말 16필에 목자가 348명 이었다. 18세기 중엽에는 568필과 839명 목자가 소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숙종 3년(677)에는 제주도의 준마 68필을 대부도목장에서 번식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상업해로로의 대부도

 

대부도는 서해해로의 중요 경유지였다. 대부도는 경기만 남부해로의 중요경유지였다. 조선후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각종 화물의 해상운송이 활발해지면서 이 해로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였다.

 

조선시대에 미곡 등의 수송은 주로 수운에 의존하였다. 특히 세곡은 각지의 창고에 집적한 후 내륙의 수로나 해로를 통하여 서울로 운송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선박은 원양항해에 적합하지 않았다.

 

18세기 중엽이후 갯벌은 넓어지고 토사가 퇴적되어 대부도와 육지 사이의 수로이용이 점차 곤란해지자 대부도와 영홍도 사이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길은 수심이 갚고 조류가 빠른 곳이었으나 삼남의 세곡선과 대동선이 지나갈 때에는 물길에 익숙한 영흥도 주민 중에서 별장과 사공이 차출되어 인도되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포구 에서 출발한 선박들은 대부분 대부도와 영홍도 사이의 수로를 취하였다.

 

-청일전쟁과 풍도해전

 

대부진이 혁파되기 1년 전인 1894년에 대부도지역의 풍도 앞바다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1876년 개항이후 조선에 대해 세력을 확장시키려던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개화당 정권이 서고 내정개학을 단행할 즈음에 7윌 23일 일본 연합함대가 풍도 안바다에서 청국 군함 제원호, 광지호에 포격을 가하여 격침시킴으로써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는 선전포고가 있기 전의 기습공격이었다.

 

-대부도 3.1운동

 

일제시기에 대부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1910년 일본의 침략주의에 조국을 빼앗긴 후 이에 항거한 국민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전개할 때 대부도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주민들의 의거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도 동리 김윤규(金允圭) 노병상()盧秉相), 홍원표(洪元杓) 등 3인이 1919년 3월 31일 대부도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다음날 오전 3시 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 곳의 주민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위의 3인 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현재의 대부도

 

시화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되어서 진입 자체는 편하다. 차가 없어도 안산역, 오이도역까지 전철로 이동해서 대부도행 버스로 환승하면 수도권 통합 요금이 적용되어 저렴하게 올 수 있다. 선재대교를 통해 옹진군이 관할하는 선재도와 영흥도로 갈 수 있다. 시화 방조제 도로를 타고 대부도로 들어오자마자 있는 방아머리 선착장에서는 옹진군 산하의 도서 지역으로 가는 여객선도 운항하고 있어 사실상 연안부두의 보조 역할도 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방조제 도로 중간에 휴게소와 공원, 전망대가 들어섰는데 그곳도 나름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지역번호로 여전히 인천 국번 032를 사용하는 등의 옹진군 시절의 잔재가 남아 있고, 안산 본토에 비해 낙후되고 관할 지자체인 안산보다 옹진군 생활권에 가까운 등의 이유로 인해 대부도 주민들은 안산시민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없다. 일단 육로로 시화방조제를 통해 나가면 시흥시에 닿으며 전곡항, 탄도항 방면 도로로 가도 화성시로 빠져나간다. 천주교 관할 교구의 경우, 안산시 본토가 수원교구 관할인데 대부도는 인천교구가 관할한다. 여기에 안산시 본토와 대부도의 대부분 지역의 우체국 택배 업무를 안양우편물류센터에서 관할하고 있다. 한국전력도 화성시 한전의 관할기역으로 있다.

 

도내 파출소로 안산단원경찰서 대부파출소, 평택해양경찰서 대부파출소, 안산파출소가 있다. 육경의 대부파출소는 풍도에 풍도분소를 두며 24시간 상주 경찰관을 배치한다. 해경의 대부파출소와 안산파출소도 출장소를 두지만 모두 본토인 시흥시와 화성시에 있다는데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도의 미래

 

그러나 대부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으로 편입해 달라는 주장이 상당히 많다. 일각에서는 아예 대부도를 옹진군에 편입시킨 후 옹진군청도 인천 본토에서 대부도로 옮겨오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한 쪽에서는 1995년 당시 대부‘면’ 그대로가 아닌 대부‘동’으로 전환되면서 편입됐기에, 안산시는 도농복합시 대열에 끼어들지 못했다. 이후 2014년 10월에 화성시 남양동이 읍으로 전환된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2014년부터 2015년 두 차례 대부면으로 전환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찬반이 팽팽해서인지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2020년에 들어 재추진 움직임을 보이는 동시에 안산시와 단원구 지역구 국회의원이 도농복합시 관련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나서기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안산시장도 직접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동이 대부면으로 전환되면 이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면 전환을 통해 도시계획 변경으로 공장 설립 등이 가능해져 녹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있어 주민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시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에서 면으로의 전환을 추진중에 있다.

 

최근에는 대부동을 대부면으로 ‘안산시, 도농복합도시 전환 법률 개정안’이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심사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밖에도 안산시의 하와이로 불리는 대부도를 관광산업의 메카로 만들자는 의견들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고 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손발을 걷어부치며 나서고 있다.

 

이미 경기도에서 경기도청소년수련원, 경기도평생대학, 바다향기수목원, 경기해양안전체험관 등을 대부도에 설립해 운영중이고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안산시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추진중인 대부바다향기테마파크를 끼고 있는 대송단지다.

 

대송단지는 시화호가 만들어지면서 조성된 간석지와 간척지로 총1,330만평 중 761만평이 안산시에 속해있다. 이는 여의도 면적(256만평)의 3배에 이르며 안산신도시 2단계(239만평) 면적의 3배에 이르기도 하다. 안산시는 이곳에 미래농업클러스터 조성, 시화지구복합단지 개발사업, 새로운 신도시, 대규모 관광단지 등을 놓고 다각적인 검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나무위키, 안산시청 홈페이지

 

김태창 기자 chang49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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