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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잔盞에 대한 상념 - 강미애 수필가

강미애 | 기사입력 2020/08/25 [12:45]

<수필> 잔盞에 대한 상념 - 강미애 수필가

강미애 | 입력 : 2020/08/25 [12:45]

 

▲ 강미애 수필가/수필평론가
교육학 석사
2001년 월간 <수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회원
저서, 산문집
『이미지기록 蒼』 외 다수
공저 『새들도 누군가의 담을 넘는다』 외 다수 

 

 

  지인에게 진사유辰砂釉 찻잔 2개를 선물했다. 사람의 마음을 훔쳐간다는 진사유는 붉은 색을 내는 도자기 유하안료釉下顔料다. 가마의 높은 온도에서도 좀처럼 제 색깔을 잘 보여주지 않는 유약이다. 찻잔을 받아 든 지인은 물끄러미 잔을 살펴보더니 꽃나무 아래에서 마시는 술잔으로 어울릴 것 같다며 웃는다. 꽃나무 아래에서 마시는 술잔이라….

 

  우리는 흔히 잔에 차나 술을 따른다. 잔에 담기는 것들은 미식美食이다. 생존을 위해 요구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인간 정신의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잔에 담기는 것들에는 ‘향유하다’라는 말이 맞춤해진다. 그리고 이때의 ‘향유’는 잔이 지닌 소통의 기억으로 완성된다. 잔은 손 안에 담기는 하나의 완성된 세계다. 홀로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잔술을 마실 때 명상의 시간과 통하는 소로小路를 보았다면 그것은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한 보이지 않는 눈, 내 손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의 눈일 것이다.

 

  진사유 찻잔은 내가 마지막으로 작업한 작품들 중 하나다. 어느 해 가을, 일본여행 중에 왼쪽 약지를 다쳐 다시는 물레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삶, 나와 다르게 저 꽃나무 속으로 걸어가는 낱낱의 인생들은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봄이 자신의 생에 몇 번째쯤 남은 봄이라는 것을. 아주 넉넉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넉넉한 시간이란 거의 언제나 안타까운 유한 속에 거처하므로 그래서 봄은, 언제나 절박하다는 사실을….

 

  15년 전쯤 도예를 전공한 선배가 공방을 열었다며 소식을 전했다. 도자기에 관심이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꽤 먼거리를 오가며 배웠다. 특히 섬세한 과정이 필요한 다기茶器에 푹 빠졌다. 흙을 물레에 올려 형체를 만들고, 초벌과 유약의 재벌과정을 거쳐 1250도의 뜨거움을 견뎌낸 다기들은 상상의 너머에서 내게 주는 선물 같았다. 아침햇살처럼 정갈한 백자, 비옥한 토양을 닮은 진한 흙색, 화창한 날 해가 비치는 바다처럼 투명한 옥색과 해가 질 무렵의 진한 하늘을 닮은 다양한 빛깔의 다기들. 오랫동안 내 손에서 흙냄새와 유약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다기는 찻물을 담는 다관茶罐, 찻물을 식히는 숙우熟盂, 퇴수기退水器, 3인 또는 5인 찻잔이 기본구성이다. 잔은 말차末茶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완茶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작다. 그래서 그것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차나 술 정도로 한정된다. 비어 있는 잔이라면 한 숟갈의 공기 정도 담을 수 있는 세계다. 사실 다도나 주도에 엄격한 이들은 차와 술을 마시는 법도를 중히 여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차의 종류에 따라 저마다 다른 찻주전자를 쓰기도 한다. 술도 역시 그렇다.

 

 그것에는 일정한 이치가 있는 것이어서 존중할 만한 법도이기는 하지만, 잔 하나에 차를 마시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 어떠랴. 그저 마음 끌리는 대로 편하게 마시면 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꼭 드는 잔이면 더 좋을 것이다. 어느 봄날, 술을 채우거나 차를 채우거나 꽃잎을 받으면서 말이다.

 

봄이 지나가고 있다. 봄꽃이 피고 지는 모든 과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벙그는 망울을 보며 꽃소식에 마음 동동거릴 때부터 하나 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기까지의 꽃나무를 본다. 그것은 약속의 시간이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할 때는 꽃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봐 주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축제의 시간, 활짝 핀 꽃나무 아래에서 우리의 시간은 가장 현재적인 몽롱함으로 찬란해진다. 이 시간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현재를 누릴 뿐이다. 짧기에 더욱 열렬하게….

 

꽃 진 자리에 무성해진 잎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추억인지, 기억의 밑자리인지 하는, 과거라는 시간이 건너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꽃 떨어져 사라져간 자리가 불탄 자리처럼 시큰거리며 또 한 번의 봄이 과거가 되었음을 일러주는 그때. 과거라는 시간은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건너온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그래서 마음은 다음을 기약하는 일에 너그럽다.

 

……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 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이성부, ‘익는 술’ 중에서)

 

 

꽃나무 아래에서 술 한 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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